Thursday daydream

2025-05-08

2025년 5월 8일 ​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 오랜만이다.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오늘 세탁기에 아끼는 노트를 돌렸기 때문이다. ​ 2025년 5월 7일 알바가 끝나면 밤 열 두시, 기타센쥬에서 막차를 타고 나는 늘 로쿠쵸역에서 내린다. 어제는 조금 피곤했다. 감기가 나았지만 가래는 낀다. 콧물도 조금 남아 있다. 핸드폰을 보다가 내릴 역을 놓쳤다. 아오이역에서 분명 나는 아직 내릴 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야시오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시오 역은 내가 사는 로쿠쵸역과 한 정거장 차이다. 그렇지만 자전거로 18분 정도 걸린다. ​ 그날은 많이 피곤했다. 늘 알바가 끝나면 바지와 팬티가 다 젖는다. 설거지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를 하면 사람들은 그걸 먹는다. 이자카야고, 작은 오픈 주방이라 다찌석 앞의 손님들은 잘 보인다. 그날 주방에서 나와 N, 미얀마 국적의 누나. 단 두 명이서 일했다. 그렇기에 내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다는 것이 잘 느껴진다. 다양한 음식을 만든다. 야채를 썰고 고기를 썰고 졸이고 굽고 뎁히고 돌리고 튀기고 끓이고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접시를 내놓는다. 나는 그 접시를 씻는다. 접시를 씻는 개수대의 물이 샌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면 앞치마를 해도 옷이 젖는다. 그리고 특유의 남긴 음식들과 물이 섞인 냄새들이 난다. 유쾌한 냄새는 아니지만 그것은 익숙하다. ​ 어제도 늘상 그렇듯, 바지는 젖었고, 배도 몹시 고팠다. 다른 알바생들의 밥을 다 만들어줬지만, 시간이 없어 내 밥은 만들지 못했다. 그것이 조금 짜증이 났다. 배가 고팠다.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먹고 싶었다. 일본은 골든위크라 맥도날드가 어제 원래 영업시간인 한 시 보다 한 시간 일찍인 열 두시에 문을 닫았다. 편의점에서 배를 채울 생각에 조금 짜증이 났다. 야시오역에서 내렸다. 배고프고 피곤한데 빨리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서 이 시점부터 짜증이 아닌 '화'가 나기 시작했다. ​ 나에게 있어 '짜증'과 '화'의 차이는 한 가지이다. 전자의 경우 속으로만 생각할 수 있고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짜증'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화'는 티가 나기 시작한다. 스스로 뚱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한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를 꽉 물었다가 놓는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몇 차례나 확인하고 허공에 주먹질을 한다. ​ 어제 그곳, 야시오에서 내리고 나는 그랬다. 화가 났다. 그렇지만 별 수 있나, 한시 바삐 공유 자전거를 빌리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다. 공유 자전거를 빌리고 나서도 내 목구멍 속, 단전, 폐와 장의 중간에 있는 그 깊은 구멍 속의 간질간질 난쟁이 같은 '화'가 자꾸만 기어올라 고개를 내민다. 나는 이때부터 화가 나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는 내가 맘에 안들기 시작한다. 이런 기분, 이런 피곤함에 내가 이런 기분을 가져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가슴 속 지렁이 꿈틀거리는 화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순간, 나는 화를 내지 않기로 내 감정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그런 다짐을 했다. 다짐을 한 순간에는 더 화가 났다, 이번에는 짜증도 함께 했다. 하지만 나는 선택을 했으니까 화를 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어머나. ​ ​ ​ 어느 순간 화가 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다. 나는 최근에 대부분의 경우 기분이 잘 나빠지지 않지만 한 번 어떤 감정이 들면 그것을 내 의지로 바꾸기 힘든 경향이 있는데, 오랜만에 든 이 기분 나쁨을 내 의지로 바꿨다. 선택했다. ​ 아마 기쁨과 고양에 젖어 이 사실을 노트에 적기 위해 가방에서 작은 노트 그러니까 오늘 세탁기에 넣고 돌린 2번 노트를 꺼내어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을 것이다. 확신 혹은 사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무지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어제 벗어 놓은 그 바지 속에 노트를 넣어놓은 기억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성의 측면에 있어서 그것 외에 별 다른 가능성이 없다. 방금 곰곰이 앉아서 어제의 기억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보아도 내가 그 가게에서 노트를 꺼낸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제는 돈키호테에서 지갑을 두고가서 다시 한 번 찾으러 간 돌출되는 기억도 있기 때문에 제법 기억들이 생생하고 신뢰성이 높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이런 경우에 아무런 기억도 없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 다시 오늘로 돌아가보자. ​ 나는 오늘 잠에 절여져 있었다. 이틀 연속으로 12시간 일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로 열 시간이 잤다. 눈을 떠도 잠에 취해있었다. 12시 쯤 일어났다. 일어난 후에는 최대한 숏폼 컨텐츠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을 들었다. 무슨 음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부터 그런 것을 보면 하루 종일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못한다. 아침 밥을 먹는다. 나는 거의 여섯 달 정도 아침으로 비슷한 것, 아니 똑같은 것을 먹고 있다. 빵, 베이컨, 계란, 토마토, 우유, 요거트 바나나 아침 밥을 먹고도 도무지 피곤이 가시질 않는다. 늘어진다. 네 시? 세 시? 쯤 민엽이가 알바에서 돌아오고, 그 후 낮잠을 조금 자고 다섯 시 쯤 일어나 무언가를 할 마음이 들어 일단 운동을 하고 장을 보러 간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고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시간 동안 한다. 오늘은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 멀리 있는 OK마트라는 저렴한 마트에서 내일 아침까지 장을 봤다. 빵, 베이컨, 토마토, 우유, 요거트, 바나나, 토마토, 새송이 버섯, 아스파라거스, 소고기, 당고, 커피, 즉석밥. 장을 본 내용물이 마음에 들고, 운동을 하고 나면 맑아진 올곧은 하나 만을 하고 하나 만을 할 수 있는 정신이 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스치는 바람도 맘에 들었다. ​ 집에 도착해 단백질 쉐이크를 먹고 씻는다. 오늘은 온전한 마음이고 싶어서 몸을 더 깨끗이 씻었다. 손톱을 깎고, 필요 없는 것들을 조금 정리한다. 고요한 집 안과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며 음악을 틀었다. 어제 민엽이가 듣던 데미안 라이스의 씨디를 플레이어에서 꺼내고, 해피엔드의 카제마치 로망 씨디를 넣었다. 첫곡은 '다키시메타이' 끌어안고싶어 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노래다.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다. 노래를 들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노래를 들으며 요리를 하는 것은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다. 다키시메타이를 다 듣고 나면 나는 카제마치로망이 질리기 시작한다. 야채를 썰다말고 씨디,레코드플레이어 겸 라디오(조만간 이 만능 음악 재생 장치에 대해서 글을 남길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앞에 앉아 씨디를 고르기 시작한다. 도니 해서웨이, 스트록스 중에 고민하다. 민엽이가 가지고 있는 옌타운 밴드의 'Montage'를 틀었다. 나는 요즘 차라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참 좋다. ​ 밥을 먹기 전에 세탁기를 돌려놓았다. 밥을 다먹으면 빨래를 널고 싶었으니까 새송이 버섯이 참 맛있다. 뜨끈한 버섯물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밥을 다 먹기 전에 빨래가 다 됐다는 세탁기의 알람이 울린다. 일단 세탁물을 꺼내놓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다 말고 세탁기 앞으로 갔다. ​ 세탁기를 여니 뭔가 흰 먼지들이 참 많이 묻어 있다, 어제 내가 영수증 같은 것을 넣고 빨래를 돌렸나하는 생각을 했다. 내 노트다. 2번 노트 ​ 1번 노트는 큰 노트다, 집에 나서기 전에 뭔가 생각하고 적고 싶거나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하거나 할 때 쓰기도 하며 집에서 뭔가를 깊게 생각할 때 쓰는 노트,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도 애용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것이 적혀 있다. ​ 2번 노트는 작은 노트다, 짧은 생각, 단편적인 것,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 어딜 나갈 때면 항상 들고 다니던 것이다. 얼마전 A양과 영상을 찍은 후 진행한 문답의 답이 적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 날 무거운 1번 노트를 들고 가기 싫었다. 그래서 1번 노트에서 미리 질문 종이만 빼서, 2번 노트와 함께 가지고 나가 그 종이를 보며 2번 노트에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을 기록했다. 아직 편집을 끝내지 못해 2번 노트의 기록은 영상을 편집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곳에는 일본에 와서 기록한 많은 생각들이 담겨 있다, 문장의 길이는 길지 않지만, 1번 노트보다도 더 많이 더 자주 생각들을 썼다. ​ 처음 그 광경을 목격하고 든 생각은 이 빨래에 묻은 수많은 먼지와 종이를 어찌하면 좋을까하는 것이었다. 샤워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빨래에 묻은 종이들을 하나하나 떼어 내기 시작한다. 물의 접착력은 옷에서 종이를 떨어지지 못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에 제법 애를 먹었다. 결국 나는 종이를 다 떼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대충 큰 덩어리만을 떼어낸 빨래를 다시 돌렸다. 한참의 내가 한 바보같은 실수에 대한 피곤한 청소를 하고 나서야 없어진, 물리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곤죽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노트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다. ​ 아쉬움, 망가진 나의 물건, 거의 마지막 페이지를 채워서 이제는 들고 다니지 않고 보관할 수 있는 반열에 오를 수도 있었던 그것, 기록의 소멸에 대한 아쉬움, 기억의 잃음에 대한 안타까움 ​ 생각보다 그다지 변하지 않는 기분. 나는 요즘 도통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다고 앞서 말한 바가 있는데 그것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곤죽이 된 노트는 사실이지만 이 변하지 않는 사실을 어떻게 거름으로 삼아 앞으로의 나의 삶에 값진 자양분으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 ​ 물론, 앞으로 빨래를 돌릴 때에 주머니를 꼭 잘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런 생각을 지금 하더라도, 악을 쓰고 노력해도, 나에게 있어서 이런 불상사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5년 후 나는 또 노트를 세탁기에 넣고 돌릴지도 모른다. ​ 그러니까 가능성이라는 것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 나는 그래서 다시 인터넷에 글을 남기기로 다짐했다. 노트에도 적겠지만, 그 노트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인터넷에도 가능한 많은 글을 남기기로 다짐했다. ​ 노트에 적힌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써도, A양과의 문답 이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든 문장 하나도 기억난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 드는 문장을 썼다는 사실이 기억이 난다.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이 하나 없는데, 쓰는 이유가 있을까하면서도 그러니까 써놓고 기억하는 것이지 싶다. 거기에 적힌 중요한 것이 있었을까, 있었겠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 노트 속의 내용을 기억해내려 하면 할 수록, 내 자신 혹은, 삶의 주제를 찾는 것 마냥 안개 낀 망망대해 속에서 유영하는 형체 없는 것을 붙잡아보려 하지만 그것을 형체로 정의할 수 있게 된 순간 원래의 그것과는 달라지는 기분처럼 유쾌하지는 못한 기분이다. ​ 그러니까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 ​ ​ ​ 이것을 계기로 기록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닐까?